
실리콘밸리 세일즈 베테랑 피터 안 인터뷰
한국 창업자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신뢰와 진정성
“AI 시대일수록 ‘관계의 예술’이
미국 시장에서의 성패를 가른다”
한국 창업자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신뢰와 진정성
“AI 시대일수록 ‘관계의 예술’이
미국 시장에서의 성패를 가른다”
실리콘밸리에서 15년 넘게 기업 간 거래(B2B) 엔터프라이즈 세일즈 최전선에 서온 피터 안 타이거비틀 최고고객책임자(CCO)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드롭박스, 슬랙, 구글 등에서 초기 영업팀을 이끌며 굵직한 계약을 성사시킨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손꼽히는 세일즈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현재는 타이거비틀에서 CCO로 활동하며 여러 스타트업을 코칭하고 있다.
안 CCO는 최근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 스타트업을 위해 핵심 조언을 전했다. 그는 “미국 시장에서의 세일즈는 단순한 영업 스킬이나 스크립트의 문제가 아니다”며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와 정직성이 승부를 가른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세일즈의 본질로서 ‘진정성(authenticity)’과 ‘차별화의 철학’을 반복해 언급했다. 다음안 안 CCO와 일문일답.
Q. 한국 스타트업들이 미국 시장 진출을 고민하면서 가장 많이 걱정하는 부분이 ‘문화 차이’ 같습니다. 현장에서 어떤 것을 느끼시나요.
A. 제 경험상 한국 창업자들은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한국은 전쟁 이후 기적적인 속도로 성장한 나라잖아요. 그 과정에서 ‘무조건 해낸다’는 결연함이 DNA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 세일즈에서는 이런 태도가 좋은 방향이 아닐 때가 많아요. 한국 창업자들은 대기업 고객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네, 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 말이 신뢰를 깨는 첫 번째 요소가 될 수 있어요. 대기업은 스타트업이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절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정확히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이 두 가지를 분명히 말하는 순간 신뢰가 생깁니다. 미국 기업과의 세일즈는 계약이 6~18개월 이상 걸릴 때도 많아요. 이 과정에서 못 하는 것을 못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창업자가 오히려 현실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평가받습니다.
Q. 미국 시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경쟁력은 어떻다고 보시나요.
A. 한국 스타트업이 가진 기술력은 아주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창업자가 자신의 기술이 경쟁사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데, 대부분 근거가 있어요. 한국인은 완성도가 충분히 나오지 않은 것을 시장에 내놓는 것을 꺼리는 문화도 갖고 있고요.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포지셔닝입니다. 한국의 교육 문화는 정답이 무엇인지 맞히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도 ‘성공한 기업의 방식을 따라 하자’는 접근에 머물 때가 많아요.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정답을 따라 하는 곳이 아니라 정답을 만드는 곳입니다. 남의 플레이북을 따라가면 이미 늦어요. 특히 세일즈에서는 더 늦습니다.
Q. 영어 문제는 어떤가요. 미국 진출을 원한다면 설립부터 영미권 문화에 익숙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어요.
A. 대부분의 한국 창업자는 영어를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합니다. 단지 스스로 불안해 할 뿐이죠. 세일즈에서 필요한 영어는 원어민처럼 완벽한 영어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비전과 기술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직접 말하는 것이에요. 영어를 잘하는 대리인을 데려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봐요. 대기업 고객은 기술의 핵심을 설명할 수 있는 창업자 본인에게 신뢰를 둡니다. 영어는 코칭과 연습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습니다.
Q. 스타트업이 초기 세일즈 미팅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실수는 무엇인가요?
A.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에요. 창업자들은 제품에 대한 설명을 많이 합니다. 전체 대화의 80%를 자기 제품 설명에 쓰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미팅이 고객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문제를 진단하는 능력입니다. 두 번째는 제품이 알아서 팔릴 것이라는 믿음이에요. 드롭박스나 슬랙조차도 제품이 스스로 팔린 적이 없어요. 기업은 오늘의 기능이 아니라 향후 5년의 비전을 보고 구매합니다.
Q. 드롭박스 초기에 NBC유니버설 계약을 성사한 얘기는 유명합니다.
A. NBC 계약은 제 경력에서 가장 어려운 도전이었습니다. 그때 드롭박스는 포춘500 고객이 단 한 곳도 없었고, 심지어 직원 수 2000명 이상 기업 고객도 없었어요. NBC는 4만2000명이 넘는 직원이 있었죠. 더 큰 문제는 경쟁사인 박스(Box)였습니다. 박스는 이미 GE를 대형 고객으로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대외적 평가도 가혹했습니다. ‘드롭박스? 그냥 사진과 파일 공유 앱 아닌가?’처럼요. 저희는 엔터프라이즈 협업 플랫폼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돌파구는 기술이었습니다. 드롭박스의 사용자 경험과 신뢰성이 경쟁사보다 훨씬 뛰어났고, 직원들이 실제로 쓰기를 원했습니다. 기업이 원하는 건 결국 ‘사람들이 기꺼이 쓰는 도구’입니다.
A. 제가 했던 중요한 접근은 이것입니다. 단점은 단점대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강점이 그 회사의 우선순위와 일치하는 지에만 집중할 것. 보안이 최우선인 은행과 의료기관보다 창의성과 협업이 중요한 미디어 기업부터 공략했습니다. NBC와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곳이 그 시기 가장 적합했어요.
Q. 가격경쟁에서 ‘노(No)’라고 말했던 일화도 인상적입니다.
A. 어떤 계약에서는 경쟁사가 우리 가격의 8분의 1 수준을 제시했습니다. 사실상 공짜로 주겠다는 느낌이었죠. 조달 담당자가 “가격을 맞출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격이 가장 중요하다면 경쟁사를 선택하세요. 하지만 품질과 사용자 경험이 중요하다면 우리 논의를 이어가야 합니다.” 짧게 보면 불리해 보이지만 길게 보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왜냐하면 전략적 거래는 가격이 아니라 가치와 비전을 중심으로 결정되기 때문이에요. 결국 그 계약을 성사했습니다.
Q. “요청하기 전에 먼저 가치를 제공하라(Give before you ask)”라는 말을 하셨어요.
A. 거래 이전부터 가치를 제공하는 철학입니다. 제품의 무료 버전만이 아니라, 내가 가진 독특한 인사이트, 사고방식, 방법론을 먼저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타이거비틀은 내부 코딩 스타일과 설계 문서를 공개합니다. 우리 제품을 쓰지 않아도 그 문서를 보고 개발팀이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의 시작입니다. 저는 콘텐츠와 팟캐스트를 통해 제 경험과 철학을 공개합니다. 한 스타트업 팀이 제 영상을 보고 대형 계약을 성사했다고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습니다. 가치 제공은 관계를 만드는 핵심 출발점이라고 봐요.
Q. 한국에서는 스토리텔링이 감성 마케팅으로 오해됩니다. 미국에서는 왜 스토리텔링이 중요한가요?
A. 미국 시장은 너무 많은 기업이 너무 많은 메시지를 쏟아내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게 거의 없습니다. 스토리텔링은 기술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문제와 연결하는 기술이에요. 그리고 최고의 스토리텔러는 말하기보다 질문하기를 잘합니다. 상대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어떤 목표를 가졌는지를 먼저 알아야 그 사람의 언어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Q. 인공지능(AI) 자동화 시대입니다. 이메일과 세일즈 자동화까지 AI가 대체하고 있어요. AI 시대 진정성 있는 세일즈는 무엇일까요.
A. AI는 사람 사이의 시간을 확보하는 도구여야 합니다. CRM 업데이트, 메모 정리, 데이터 자동 수집처럼 반복적이고 행정적인 일은 AI가 도와야 합니다. 그 시간을 세일즈 담당자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써야 합니다. 사람을 이해하려면 최소 30분은 상대의 글이나 포스트를 읽고 생각해야 합니다. 요약본만 읽으면 연결의 깊이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완벽함보다 취약함, 독특함, 개성에 신뢰를 둡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 템플릿화돼 있어서 진짜 사람의 흔적이 구별됩니다.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공식이나 정답을 찾으려는 마음을 버렸으면 합니다. 세일즈는 공식이 아니라 ‘관계의 예술(Art of Sales)’입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신뢰를 쌓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신뢰가 쌓이면 매출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실리콘밸리 원호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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