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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ficial intelligence with human brain circuit electric background. Digital futuristic big data and machine learning. vector banner art illustration.
인공지능 기술 관련 교사 연수. “2000년대 이후에 여러 아이티(IT) 기술이 등장해서 근무 시간 중에 여유가 좀 생기셨죠? 주말에는 여가 생활도 즐길 수 있으시고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한 분이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럼요. 저녁이 있는 삶이어서 행복하네요.” 좌중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기술은 특정 과업에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지만 그것이 삶의 여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기술의 발달이 노동의 밀도와 강도를 조금씩 올리고 있다는 것을.

주변의 많은 이들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특히 대도시의 삶에서 바쁨은 암묵적인 기본값이 되었다. 이런 세태는 언어에도 반영된다. “안 바쁜 사람이 어딨냐?”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모두의 열악한 상황을 직시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또 ‘왜 이렇게 정신없이 살고 있을까?’라는 자조 섞인 감정을 나누면서 이 말을 주고받는다.

인공지능은 ‘시간 압축 기계’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글쓰기를 몇 분 안에 할 수 있도록 돕고, 여러 사람이 매달려야 할 코딩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도록 한다. 관찰과 스케치, 채색과 마무리의 지난한 과정을 인공지능과의 짧은 상호작용으로 바꿔 놓는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확산은 지식 노동 전반에 가속 페달을 달았다. 언뜻 보면 늘 겪는 분주함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해결책 같다. 종일 해야 할 일을 뚝딱 해치울 수 있다면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여러 면에서 착시다. 먼저 노동을 생각해 보자. 만약 8시간 노동이 필요한 과업을 1시간 안에 마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7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경영자는 7시간 동안 할 일을 추가로 요구할 것이다. 더 나쁜 소식도 있다. 일부 경영자들은 인공지능의 역량을 과대평가해 더 많은 작업을 요구한다. 게다가 사실 많은 노동은 특정 시간에 맞추어 진행되어야 한다. 작업 시간이 단축된다고 해서 마감 관련 업무를 오전 9시에 처리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인공지능 덕에 일이 더 많아진다.

학습도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3시간 걸릴 과제를 15분에 해낼 수 있다면 나머지 시간을 의미있는 학습과 휴식, 놀이와 만남으로 돌릴 수 있을까? 대부분의 청소년은 내신과 입시의 압력으로 인해 남은 시간을 평가와 시험 준비에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취업 준비생이라면 관련 자격을 갖추기 위해 동분서주할 공산이 크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면 여유 시간을 몽땅 쇼츠와 소셜미디어 스크롤링에 쓰게 될 수도 있다. 구조적 압력과 심리적 환경의 변화 없는 가속기계의 도입은 큰 의미가 없다.

인공지능은 분명 특정한 과업의 효율성을 높인다. 하지만 그것은 가속화를 거듭하는 현대 기술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해법이 아니다. 강화된 생산성은 오히려 가속화를 심화한다. 더 빠르게, 더 자주, 더 많이 결과물을 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노동 시간에 대한 노동자 소유권은 약화한다. 학습은 체화되지 못한 채 그저 디지털 흔적, 탄소 발자국으로 남는다.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공지능이 추동하는 삶의 가속을 우리 신체와 공동체가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그 속도에 적응하는 것만이 생존의 유일한 조건이 된다면 이는 결국 기술 친화적인 소수만을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승인하고 나머지는 사회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가? 질문을 외면하는 동안 기술은 질주하고 삶의 호흡은 가빠온다.

김성우 응용언어학자